우리 술 칼럼
술술 Talk
[이해림의 한국술 테이스팅 #3] 그랑꼬또 청수 2017
2018-11-02

 

완성도 높은 한국술들이 속속 등장하는 동안에 한국술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떨쳐냈지만, 한국 와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포가 있다. 한국에서 와인을 만드는 분들의 전투적인 소명의식을 목격한 바 있어서다. 맹목적이었다. 무섭게 왜들 그러세요?

 

와인을 위한 포도가 따로 있고 땅이 있고 기후가 따로 있는데 초고온다습하다가 엄동설한으로 스위치돼버리는 이상한 기후의 한국에서 굳이 경쟁력 떨어지는 와인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도 해결되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의 포도는 꽤나 맛이 좋아서, 생식으로 소비되는 것만 해도 충분히 사랑 받고 있는 작물이 아닌가? 비아냥은 아니고, (쓸 데 없는) 걱정이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시는 건가요?

 

대부도에서 만드는 ‘그랑꼬또 청수’에 대해서는 그간 수많은 호평을 들었다. 한국술 전문가들이 어김 없이 추천하곤 하는 한국 와인이다. 전투적인 소명의식을 가진 분도, 사서 고생하는 분도 모두가 추천했다. 해외에서 상도 많이 받고 있다. 덕분에 긴장하지 않고 느긋한 마음으로 코르크를 열 수 있었다.

 

와인이니, 일단 포도 품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농촌진흥청에서는 1990년대 일찍이부터 와인용 포도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왔다. 1993년 개발한 푸르르디 푸르른 청포도 품종 ‘청수’는 실상은 생식용으로 개발한 것이었지만 막상 각양각색 전문가들에게 맛을 보였더니 “화이트 와인 양조에 적합한 포도”라는 평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2008년 와인 양조용 품종으로 이름표를 바꿔 단 청수를 이용한 와인이 탄생했다. 바로 그랑꼬또 청수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은 2017년 빈티지. 바로 작년 가을 수확한 청수 포도로 양조한 젊은 와인이다. 아무런 고민 없이 술잔 찬장에서 샴페인용 잔을 꺼냈다. 샴페인 중에서도 값 비싸서 기포와 풍미가 두루 좋은 것에 쓰도록 고안된 잔인데, 청수가 가진 강렬한 과실향을 즐기기엔 화이트 와인 잔보다 이쪽이 더 잘 맞겠다는 판단이었다. 농촌진흥청 연구 결과에 따르면 청수 포도는 와인의 과일 향을 내는 성분이 샤르도네나 리슬링 같은 본토의 포도보다도 5배나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과연, 향으로 마시는 와인이다. 청포도가 가진 싱그럽고도 청량한 향이 듬뿍이다. 열대과일 같기도 하고 시트러스 같기도 한 향도 톡톡 튀며 흘러간다. 달달한 맛 또한 꿀처럼 자연스러워서 새하얀 시폰 크림 케이크 한 조각 놓고 함께 먹고 싶어진다. 디저트 와인으로 제격이다.

 

동시에 살이 꽉 찬 가을 꽃게도 견딜 수 없이 당기는 맛과 향이다. 전반적으로 달보드레한 캐릭터에, 알록달록한 사탕처럼 새콤한 향이 가득해 새하얀 게살을 발라 숟가락에 수북하게 얹고 차갑게 식힌 그랑꼬또 청수 1997 한 모금을 머금으면 그 자리에서 승천해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청수는 엄마 품종 유럽계 ‘세이벨9110’과 아빠 품종 미국계 ‘힘로드’를 교배해 만든 포도다. 미국 뉴욕주 세네카 호수 근처에는 힘로드 품종으로 와인을 양조하는 와이너리가 있다고 한다. 농촌진흥청 과수과에서 포도와 와인를 연구하는 허은영 박사에 따르면 향은 아빠 품종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청수가 아빠보다 강한 향을 낸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껏 경험함 수많은 화이트 와인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동양의 끝나라 한국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독특한 와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문명을 이루는 내내 와인을 만들며 이제는 별별 기기묘묘한 맛을 다 내는 그들의 와인 문명을 한국에서 똑같이 만들어낸다는 것은, 무모하다. 이미 지고 시작하는 경쟁을 할 이유가 없다.

 

동양의 끝나라 한국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독특한 와인. 동시에 그 의미로서 충분하기도 하다. 오로지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와인로서의 가능성에 집중해보면 어떨까? 청수 자체가 한국의 고온다습하다가 자비 없이 추워지는 기후에 걸맞게 육종된 품종이다. 이런 기후, 흔치 않다.

 

누군가 외국 친구가 한국술을 경험해보고 싶다고 할 때 “좋은 리슬링들과는 분명 다르지만,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매력이 있어” 하며 그랑꼬또 청수 1997을 권해보고 싶다. 그가 어떤 경험과 취향을 가진 친구여도, 내가 “재미있을 거야”라고 덧붙일 때 가장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다. 한국이 가진 맛으로 좀더 완성하면 그것으로도 충분할, 어디에도 없을 한국의 와인이었다.

 

 

 

 

 

 

 

 

이해림(푸드 칼럼니스트)

>> 한국술을 이제는 좀 맛으로 이야기해보고자, 오로지 술의 맛을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안주를 망상한다. 알 수 없는 효능이나 지루하게 반복되는 역사 이야기는 배제한다. 한국 음식 문화의 하나로서 현재의 한국술이 가진 본질적이고도 참된 가치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