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 칼럼
술술 Talk
[심현희 기자의 우리술 시음기] 술의 ‘격’ 국순당 ‘자주’
2019-11-01

 

세상의 모든 술에는 저마다의 ‘격’이 있다. 특정 술을 비하하기 위해 꺼내는 말은 아니다.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결혼식 하객이나 상가집 조문객으로 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하듯 TOP(Time,Place, Occasion) 법칙은 ‘술자리’에도 적용된다. 멀리서 온 귀한 손님을 깍듯하게 대접하는 자리에 희석식 소주를 내놓는다는 건 영 찝찝한 일이다. 반면 편안한 자리에 지인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매개체로 초록병만한 것이 없다.

 

최근 우리 가정의 불화는 한 술의 ‘격’으로부터 시작됐다. 주인공은 국순당의 자주다.

자주는 역사 속에서 잊혀질 뻔한 옛날의 우리술을 복원하는 ‘법고창신’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술로, 고려시대 귀족들이 즐겨마시던 명주다. 국순당은 2008년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자취를 감추고 문헌으로만 존재하는 우리술 600가지를 연구하고 있다.

 

추석 전 이 자주를 시음하기 위해 확보했다. 상자에는 자주 한병과 전용잔 두잔이 들어있다. 옛날 토기를 닮은, 가로 줄무늬가 특징인 병 디자인이 고급스러우면서도 정감이 갔다.

‘언박싱’하는 재미가 있었고 좋은 술임을 직감했다. 아껴마시고 싶어 술병을 따지 않은 채 추석 연휴 기간 베트남 휴가를 떠났다.

“다녀와서 마셔봐야지.”라는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다. 고이 모셔둔 자주 두병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온 집안을 뒤져보니 부엌 수납장에서 자주 빈병들이 발견됐다. 한병에는 술 대신 참기름이 들어있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엄마에게 물었다. 취재 결과 언젠가부터 업계의 ‘술 전문가’가 되어있는 딸의 방에 쌓인 수많은 시음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부모님은 추석 연휴에 ‘자주’ 세트를 발견하고 강한 유혹에 시달렸다.

 

엄마는 “우리같은 5060세대 사이에서 국순당은 브랜드는 매우 고급스러운 이미지”라면서 “1년에 2번 조상을 기리는 제사상에 귀한 술을 올리고 싶었고, 자주를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라는 느낌이 왔으며 마침 너도 없어 다시 없을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사춘기는 아니지만 부모님을 이해하기가 싫었다. “왜 남의 술을 묻지도 않고 훔쳐가느냐”는 말들을 쏟아내고 방문을 쾅 닫았다. 믿었던 가족에게 술을 뺏긴 기분은 뭐라고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부모님으로부터 자주의 판매가에 해당하는 돈도 받아두었지만 허탈했다.

 

하지만 마냥 망연자실해 있을 순 없었다. 일은 해야하니까. 어렵게 자주 한병을 다시 구했다. 고생 끝에 마시는 술이어서 혹여나 더 맛있게 느껴질까봐 평정심을 찾기 위해 이른 아침에 시음을 했다. 달콤한 꿀향과 후추의 알싸함이 강하게 올라왔다. 끝에 인삼, 황기 등 약재 뉘앙스가 깔끔하게 떨어져 전체적인 술의 균형을 맞춰준다. 고급스러운 맛이다.

 

수육이나 삼계탕 등에 아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자주를 차례상에 올리면 잘 어울리긴 하겠다. 그에 맞는 ‘격’을 갖추었다. 제사상에 품격 있는 전통주를 올리는 문화가 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평소에 하곤 한다. 내 술을 훔쳐간 부모님을 이제 그만 이해하기로 했다.

 

 

 

 

 

 

 

 

 

심현희 서울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