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술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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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칼럼] 구한말에 등장한 샴페인과 위스키…왜?
2020-03-03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대엔 요정집이 있었다. 밀실정치와 검은 거래가 오간 이른바 ‘요정 정치’의 중심지였다. 요정의 기원을 살피면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에는 명월관(明月館)을 비롯하여 국일관(國一館), 송죽관(松竹館) 등의 요릿집이 있었다. 이들 고급 요릿집들에는 기생들이 있었고, 그들이 권하는 음식은 궁중요리였다, 궁중 나인 출신들이 담근 술도 팔았다. 전통주다. 놀랍게도 샴페인이나 위스키 등도 등장했는데, 그 시작은 궁의 음식 문화 변화부터였다고 한다.

조선왕조는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꾀했다. 이런 움직임은 음식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당시 외국 음식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인 곳은 궁중이었다. 고종은 독일인 손탁(대한제국 서양식 연회 총감독)이 만들어 올렸던 프랑스 요리와 커피를 즐겼다. 황태자는 아침은 서양 요리, 점심은 일본 요리, 저녁은 다시 서양요리를 즐겼을 정도였다. 궁중을 찾은 대내외 관료들에게도 커피뿐만 아니라 프랑스산 포도주, 샴페인, 영국산 비스킷, 빵 등을 제공할 정도로 궁중 음식문화는 빠르게 서양식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궁의 왕족과 고위층에서만 한정되었다. 개항 후 서울을 찾은 외국인들이 찾아갈 만한 요릿집은 없었다. 이러던 차에 생겨난 고급 음식점 겸 유흥 공간이 요릿집(조선요리옥)이다. 요릿집에 출입하던 사람들은 평민이 아니었다. 음식값이 비쌌다. 그 안에서 벌어진 유흥은 사회적 지위와 재력이 없으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위층들의 사교장이었던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요릿집이었던 명월관은 과일, 과자, 담배 등과 함께 각종 궁중 연회식을 제공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접대용 술 안주상도 등장했다. 명월관의 설립자인 안순환은 궁중 요리사였다. 당연히 명월관의 밥상과 술상엔 궁의 음식 문화가 배였다. 처음에는 약주, 소주 등 우리 전통술과 일본 술을 판매했다. 이후 샴페인, 위스키, 브랜드, 포도주 등 서양 술들이 상에 올랐다. 당시 술은 권력을 가진 이들과 서민들을 극명하게 나누는 잣대가 됐다. ‘당신이 마시는 술을 알려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요릿집은 현대에 이르러 한정식 식당으로 변신했다는 주장이 있다. 상다리 휘어지게 한 상 떡 벌어지게 나오는 모양새가 그 옛날 요릿집과 닮았다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호텔과 고급 음식점에선 전통주보다는 포도주, 샴페인 그리고 위스키를 취급한다. 전통주를 고급 음식점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과거 서양 술 판매에 힘을 쏟은 요릿집의 차별화된 판매 전략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걸까. 우리 스스로 전통주의 가치를 낮게 보는 것은 아닐까.

지금 전통주는 과거에 견줘 그 질이 월등히 향상됐다. 수입 술과 견줘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디자인 역시 세련됐다.

 

 

 

 

 

 

글 이대형(경기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전통주갤러리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