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 칼럼

전통주 칼럼:: 나는 술이 좋았던 걸까, 술자리가 좋았던 걸까? | 편성준 작가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22-01-20
  • 조회수 1068

 

 

 

 

최영미 시인의 시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다 보면 자신이 학생운동보다는 운동가요를, 술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고백이 나오는데, 1994년 이 시가 들어있는 같은 이름의 시집이 나왔을 때 독자들은 열광했고 특히 이 구절에 밑줄을 그으며 즐거워했다. 사는 곳이 다르고 태어난 연도가 달라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술이 좋으냐 술자리가 좋으냐'의 문제는 인류 문명사만큼이나 긴 술의 역사에서도 꽤 오래된 논쟁거리 중 하나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 하나는 누구에게나 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꼭 맛있거나 고급스러워야만 좋은 술은 아니었다. 이 칼럼에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술은 무슨 재료로 어떻게 만드냐보다는 누구와 마시느냐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으니까. 나의 대학 시절과 광고대행사 신입 시절도 그랬다. 술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거나 하루 일과가 종료되면 주종을 가리지 않고 늘 술자리가 벌어졌고 때로는 거기서 인생이 바뀔 만큼 중요한 일이 벌어지거나 결정적인 만남들이 이루어졌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도 술 덕분이었다. 술과 술자리를 모두 좋아했던 나는 친구들과 박수를 치며 깔깔거리고 웃던 술자리의 기억이 다음날 아침이면 실험용 알콜처럼 허무하게 증발해 버리는 게 아까워 '음주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전날 있었던 술자리를 가능한 한 자세하게 묘사하고 누군가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그의 술버릇이나 말투, 그날의 음주 행각 등을 되새기며 즐기는 글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제법 인기가 좋아서 나중에는 자신을 일기에 출연시켜 달리는 청탁(?)까지 받을 정도였다. '한두 번 쓰고 말아야지' 생각했던 글은 50여 회가 넘도록 당시 유행하던 미니홈피에 연재되면서 나름 팬까지 확보하게 되었고 나는 음주일기를 통해 글쓰기 습작을 하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누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그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행운이 찾아왔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로수길의 단골 바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어떤 여자가 당시 친하게 지내던 후배한테서 "내 주변에 음주일기를 쓰는 이상한 오빠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인터넷에 들어가 음주일기를 몇 편 읽어본 것이다. 출판 기획자였던 그녀는 음주일기를 쓴 사람에게 '기이한 호감'을 느끼게 되었고 며칠 후 단골 바에 놀러 온 그를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된다. 역사적인 첫 만남이었다. 우연한 첫 만남 이후 고심을 거듭하던 그녀 윤혜자는 53일이 지난 후 "고노와다(해삼 내장)에 소주 한 잔 하실래요?"라는 카톡 메시지를 편성준에게 보낸 뒤 만나 사귀게 되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윤혜자는 편성준을 독려해 글을 쓰게 함으로써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와 『여보, 나 제주에서 한 달만 살다 올게』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으니, 결국 내가 두 권의 책을 내고 지금처럼 글쓰기 강의를 하러 다니게 된 것도 다 술 덕분이었던 것이다.

 

 

 

 

 

 

 

 

술과 글로 성공한 케이스를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히 김혼비 작가가 떠올랐다. 그는 『아무튼, 술』이라는 에세이를 썼는데 이 책은 '아무튼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많이 팔리고 인기가 좋다. 그도 그럴 것이 김혼비는 정말 글발이 좋은 데다가 여성으로서는 쉽지 않은(않았던,으로 고쳐야겠다. 술엔 남녀 구분이 무의미하므로) '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자신의 인생관은 물론 애정사, 대인관계, 사회 경력 등을 잘난 척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은근하고 고급스러운 유머를 구사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게 술로 인한 가벼운 일탈을 묘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 발행된 『다정소감』이라는 에세이를 읽어보니 그도 우리 부부처럼 술로 인해 남편과 맺어진 케이스였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술 이야기만으로도 나는 묘한 동지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마시지 못하면서도 술을 매개체로 자신을 잘 드러낸 사람도 있다.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라는 시집을 낸 이원하 시인이다. 그는 실제로 술을 잘 못하기도 하지만 하고 많은 특징 중에서 '술을 잘 못한다'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읽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묘한 매력을 뽐낸다. 무라카미 하루키 말대로 역시 '굴튀김보다 중요한 건 굴튀김에 대해 어떻게 쓰느냐'인 것이다. 특히 제목 짓는 센스가 기가 막히다. 최근 몇 년 사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만큼이나 잘 지은 제목이라 생각한다.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얘기 중 하나는 '좋은 글을 쓰려면 컨디션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처럼 피곤하면 글이 제대로 써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드거 앨런 포우 같은 천재 작가는 늘 술에 취해 있었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작품을 쓸 때만큼은 말짱한 정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술을 아예 안 마시는 건 또 곤란하다.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감자탕집에 붙어 있는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이 공짜'라는 안내문을 읽고 임희구 시인이 다시 술병을 집어 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술자리가 주는 감정의 이완과 고양은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기 때문이 아닐까.

 

 

 

 

소주 한 병이 공짜

임희구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 『소주 한 병이 공짜』, 문학의전당, 2011.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날씬한 술병을 하나 꺼내놓았다. 오늘 같은 날 가볍게 마시기엔 딱일 것 같다고 내놓은 술은 샤토미소 캠벨 스위트 로제라는 와인이었는데 국내 최대 포도 주산지이자 와인의 고장인 충북 영동의 도란원이라는 국내 와이너리에서 만들어진 술이었다. 영동은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마주하는 백두대간 줄기에 있는 내륙산간 지방이라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해 포도를 재배하기에 알맞은 기후를 갖춘 곳이라고 하더니 그 명성에 걸맞게 부드럽고 산뜻한 맛을 냈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게 젊은 여성들이 파티할 때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쓰는 글이 연재 마지막 칼럼입니다. 그동안 더술닷컴의 배려로 좋은 우리 술을 맛보고 공부하면서 글을 쓰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칼럼을 쓰면서 깨달은 점은 우리에게 좋은 술이 없는 게 아니라 좋은 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BTS와 OTT 드라마들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상황입니다. 이 좋은 기운을 타고 우리의 술들도 힘을 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갑자기 존댓말로 쓰는 이유는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건강하십시오. 그럼 이만 총총.

 

2021년 12월 모일 편성준 드림.

 

 

 

 

샤토미소 로제스위트와인

주종: 와인

제조사 : 도란원

주원료 : 국내산 포도원액

규격/도수 : 375ml / 12%

제품특징 :

우리 입맛에 맞는 한국형 와인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우리 포도로 만든 와인으로서 포도를 재경파쇄하고, 착즙하여 순수 주스만을 도란원만의 제조비법으로 발효하여 은은한 향과 빛깔이 아름답고 풍미가 새콤달콤하고 상큼한 맛의 조화가 부드러우며 복숭아, 딸기, 장미향으로 환상적인 아로마를 연출한다.

 

 

 

 

 


 

 

 

 

글 : 편성준 작가

MBC애드컴, TBWA/Korea 등의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서든리', '2월31일' 등의 프로덕션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했습니다. 2020년에 '좀 바보 같이 살아도 큰일 안 난다' '미루지 말고 지금 놀자'라는 이야기를 담은 첫 에세이집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현재 글쓰기에 대한 책 집필과 글쓰기·책쓰기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손상이나 치매를 유발합니다. 임신 중 음주는 기형아 출생 위험을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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