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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칼럼:: 탁재형 PD의 우리술 로드 | 명인안동소주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2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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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은 예로부터 소주의 고장이었다. 몽골군이 한반도에서 100년의 세월을 보내고 간 이래, 그들이 병참기지로 삼았던 개성, 안동, 제주에는 증류주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13세기, 동시대 과학의 중심지 바그다드까지 발 아래에 두었던 칭기즈칸의 병사들은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었던 알코올 증류법의 전도사들이기도 했다. 그들에 의해 이식된 아라길주(亞刺吉酒) 제조의 비법은 솜씨 좋고 생활력 강한 안동의 여인들을 통해 대대로 이어졌다. 일제에 의해, 그리고 군사정권에 의해 우리의 전통 술빚기가 금지되었을 때도 안동 사람들은 선조들이 물려준 향기로운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다시금 증류식 소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요즈음이고 보면, 전통 증류식 쌀소주 부활의 많은 부분을 안동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안동은 예로부터 사대부의 고장이었다. 집집마다 제사를 비롯해 손님 치를 일이 많았고, 이런 저런 대소사에 소주는 빠져서는 안될 존재였다. 손님이 오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술을 대접하는 일이었고, 그 술이 훌륭해야 '대접 잘 받고 간다'는 소리가 나왔다. 당연히 가문마다 소주를 빚는 비법이 따로 있었고, 일제의 주세령에 의해 가양주의 제조가 사실상 금지된 1930년대 이후로도 안동에서는 술 잘 빚기로 소문난 아낙네들의 활약이 끊이지 않았다. 현재 '명인안동소주'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찬관 대표의 할머니도 그런 분들 중 한 분이었다. "한 번은 누군가의 신고로 순사가 단속을 나왔더랍니다. 다행히 술독은 땅에 잘 파묻어서 발견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벌금은 내야 했대요. 그런데 다음날, 그 순사가 다시 찾아왔더랍니다. 서울에서 높은 분이 내려왔는데, 술을 대접해야 하니 한 병만 줄 수 없겠냐고 하면서요."

 

 

 

 

 

박찬관 대표의 선친인 박재서 명인(대한민국 식품명인 제6호)은 이런 어머니로부터 술 만드는 법을 배웠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에 더해, 일제시대 때 이미 한반도와 만주까지 이름이 났던 안동의 특산 브랜드 '제비원 소주'의 명인으로부터 대량생산의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제비원 소주'는 안동시 남문동에 자리를 잡은 '안동주조'에서 1920년부터 만들던 소주의 이름이다. 때가 때이니만큼, 조선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방법을 그대로 계승한 소주를 만들 수는 없었고 일본에서 개발된 검은누룩곰팡이를 이용한 흑국 소주를 만들었다. 하지만 안동 특유의 물맛과 풍산 평야의 쌀맛에, 정성어린 손맛까지 더해져 커다란 인기를 얻었고 일본과 만주로 수출까지 했다. 이런 제비원 소주가 위기를 맞이한 것은 소주 제조에 곡식을 쓰는 것이 완전히 금지된 1964년 이후였다. 시류에 맞춰 희석식으로 제법을 변경했지만 옛맛을 잊지 못하던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고, 결국 '1도 1소주 정책'의 희생양으로 1974년 금복주에 통합되고 말았다. 현재 '제비원 소주'의 상표권은 금복주가 가지고 있지만, 명인안동소주는 자신들이야말로 '제비원 소주'의 명맥을 잇는 후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공장 건물 지하에 조성된 소주 박물관에 꼼꼼히 수집해 놓은 일제시대 이래의 역사자료들, 그리고 감압 증류를 바탕으로 하는 깔끔한 맛의 추구야말로 그러한 인식의 발로다.

 

 

 

 

 

박재서 명인이 지금의 명인안동소주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에 의해 안동소주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1986년 이후였다. 다가오는 올림픽을 앞두고 당장 세계에 선보일 우리술이 없다는 자각 끝에 정부는 전국의 향토 명주를 조사하는 사업에 착수한다. 이 때 1차 선정된 13 종의 술 중 하나가 안동소주였다. 덕분에 1987년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이번엔 쌀을 주원료로 하는 증류주라는 점이 발목을 잡았다. 당시의 주세법으로는 이런 술은 아예 제조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고, '무형문화재이지만 만들면 불법'이라는 기묘한 상황이 몇 년간 이어졌다. 지금은 작고한 안동소주의 또 한명의 거장, 故 조옥화 명인(1922-2020)의 줄기찬 문제제기와 안동 시민들의 '범시민안동소주부활운동'에 힘입어 주세법이 바뀌었고, 비로소 합법적으로 제조,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런 현대사의 커다란 장애물을 몇 개나 넘고 나서야, 비로소 1992년 명인안동소주가 출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래 직업군인이었던 박찬관 대표는 아버지 박재서 명인이 회사를 설립하고 공장을 건축할 때 합류했다. 11년에 걸친 군생활을 뒤로 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런 저런 초기의 어려움을 아버지와 함께 버텨내며 지금의 기반을 만들기까지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안동소주의 높은 인지도에 힘입어 초기부터 부지 2만평, 설비투자 86억원대의 대형 공장을 갖춰 놓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고 한때 200억원대 매출을 올리기도 했지만, 위기는 일찍 찾아왔다. 초반엔 농협을 상대로 납품하는 방식이어서 수금에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양재동에 있는 농협 창고에 물건을 가져다 놓기만 하면 즉시 대금이 지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단위농협 별로 해당 지역의 특산주를 취급하게 되며 명인안동소주는 대형마트를 통한 유통에 눈을 돌려야 했다. 이마트, 홈플러스 등의 대형마트의 매대에 안동소주를 올려놓기 위해선 중간판매자를 통해야 했고, 납품된 소주가 판매 되어야만 대금을 받을 수 있었다. 시일이 지나도 팔리지 않으면 재고를 떠안아야 했다. 50일 이상 묶이게 되는 자금만 40-50억에 달했다. 지역의 대형마트 체인이 통째로 부도나는 바람에 엄청난 판매 대금을 날리기도 했다. 1997년엔 관련 법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안동소주 직매장을 만들었다가 '변형된 거래처를 운영했다'는 죄목으로 거액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린 박 대표는 더 이상 양조장 경영에 참여할 뜻을 잃고 2년 간 예식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 박 대표를 다시 돌려 세운 것은 역시 아버지였다.

"아버지께서 이러시더라고요. '우리가 지금까지 이만큼 적자를 봤고 지금껏 내다 버린 돈이 수십억인데, 네가 더 이상 안동소주를 잇지 않는다면 그 수십억을 다 가져다 버린 셈이다. 네가 만일 계속한다고 하면 그 돈은 다 살아 있는 돈이다.' 그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 먹었죠.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바닥을 친 명인안동소주가 새롭게 도약할 기회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2014년 2월의 어느 날, 'DVD 프라임'이라는 인터넷 동호회에 한 회원이 지난 설에 자신이 마신 술에 대한 예찬을 게시판에 올렸다. 그가 '은은하고 맑은 향이 일품이고 목넘김도 좋다'고 극찬한 술은 다름아닌 명인안동소주였다. 이 때만 해도 희석식 소주가 소주의 전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던 시기였다. 그런 이들에게 스카치 위스키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맛과 향을 가지고 있는 우리 증류주에 대한 정보는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준 전문가급의 영상기기 매니아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해당 사이트의 특성상, 게시물은 믿을만한 정보로 인식되어 '오늘의 유머', '이종격투기 카페' 같은 대형 커뮤니티에도 퍼져 나갔고, 안동소주의 존재를 알게 된 이들은 너도 나도 인터넷으로 전화로 주문을 넣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2010년의 규제 완화로, 민속주와 지역특산주에 한해 통신판매가 폭넓게 허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 또한 술을 배달시켜 먹을 수 있음을 처음 알게 된 이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박 대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챈다. 설날 직전 대부분의 판매가 이루어지는 전통주의 특성상 이제 한 숨 돌릴 시즌이 되었는데, 눈코 뜰 새 없이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홈페이지에 하루 접속자가 18만까지 늘어났어요. 바로 다운되어 버렸죠. 갑자기 대형 포탈에도 실시간 검색어 1위로 올라가고요. 하루아침에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창고에 있던 재고가 동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술이 떨어져 가니 그렇게 급하지 않은 분들은 주문을 자제해 달라고 공지를 올렸죠. 그러니까 주문이 더 많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더니 급기야는 사람들이 공장으로 직접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00커뮤니티 안동소주 원정대'라 쓰여진 깃발을 휘날리며 안동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성배라도 차지한 것처럼 소주 박스를 손에 들고 인증샷을 찍었고, 인터넷에는 시음후기가 넘쳐났다. 성실하게 전통의 맛을 지켜온 생산자의 뚝심과 가치를 아는 소비자들의 유쾌한 에너지, 그리고 정부의 규제완화가 맞물려 만들어낸 시너지였다. 당시 '안동소주 대란' 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게시판은 물론 주요 신문에까지 실렸던 이 사건은 전통주 일반에 대한 인식을 바꾼 계기로도 작용했다. 안동소주의 맛을 알게 된 사람들이 다른 전통주에까지 눈을 돌렸던 것이다. 당시의 게시물 중에는 말미에 우리술 품평회에서 입상한 다른 양조장의 목록까지 포함시켜 놓은 것들이 아직도 눈에 띈다. 창업 후 23년 동안 이어진 적자가 흑자로 전환된 것은 이 즈음이었다.

"나중에 제가 답글을 썼어요. 정말 고맙다고요. 그러고 나서 6개월 후에 서울에서 있었던 행사에서 글을 처음 올린 분을 만났죠. 반갑게 포옹을 했습니다. 그 분께는 다른 것은 해드릴 게 없고 안동소주는 평생을 드실 수 있게 해드리겠다 하고 저희 제품을 한 달에 몇 박스씩 보내 드렸어요. 그 분이 이제 됐다고 하실 때까지 7년 정도를 보내 드렸죠."

이 때 확보한 안동소주 매니아들은 아직까지도 홈페이지에서 술을 박스 단위로 주문해 먹는 코어 고객층이 되었다. 2017년, 온라인 쇼핑몰에서 전통주를 전면적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되었을 당시 이미 명인안동소주는 5만 명의 홈페이지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충성도 높은 고객들에 더해 정부의 전통주 감세정책이 빛을 보며 명인안동소주의 살림살이는 크게 개선되었다. 한 대기업에서 지원해 준 '스마트 공장 지원 프로그램'에 의해 공장의 규모는 줄이면서도 공정의 많은 부분을 자동화한 것도 재정을 건실하게 한 요인이었다. 현재는 제 2 공장 가동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명인안동소주에서 현재 생산하고 있는 것은 45도, 35도, 22도, 19도의 4개 제품군이다. 밑술은 안동지역에서 난 멥쌀을 원료로 3양주 방식의 '3단 사입(발효)' 기법으로 빚는다. 이 부분은 과거 제비원 소주의 전통을 명인안동소주가 잇고 있다는 증거다. 이 방법을 통해 밑술의 알코올 도수를 20도 넘게 끌어올려, 한 번의 증류로도 원하는 최종 도수를 얻어낼 수 있게 된다. 명인안동소주의 또 한가지 특징은, 전자제어가 가능한 감압증류기를 이용해 45도면 45도, 35도면 35도에 맞게 정확하게 증류해낸다는 것이다. 비교적 낮은 도수의 소주라고 해서 증류 원액에 물을 타는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증류 중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알코올 도수를 전자적으로 측정해, 증류액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과 끊는 시점을 정확히 콘트롤함으로써 원하는 제품을 얻는다. 셋팅된 도수에 따라 각기 다른 증류 시점에 받은 원액으로 만들기 때문에, 명인안동소주의 45도와 35도, 22도는 알코올의 작열감 뿐만 아니라 맛 자체가 미묘하게 다르다. 그것을 느껴보는 것 또한 명인안동소주를 마시는 재미 중 한 부분이다. 명인안동소주는 증류식 소주임에도 불구하고, 증류 원액의 필터링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자갈, 모래, 활성탄으로 구성된 필터를 통해 잡스러운 향을 최대한 걸러낸다. 보통의 기압보다 낮은 환경을 조성해 더 낮은 온도에서 알코올이 끓어 나오게 만드는 감압 증류의 특성과 이 필터링 공정이 합쳐져, 명인안동소주는 안동소주 중에서도 유독 깔끔하고 깨끗한 맛을 지녔다. 식품명인 타이틀을 함께 가지고 있는 故 조옥화 명인의 '민속주 안동소주'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더 잘 드러난다. 분명히 쌀이라는 캔버스 위에 증류식 소주라는 기본적인 색채를 공유하고 있지만, 한쪽은 두텁게 바른 유화, 다른 한쪽은 날렵하게 그린 아크릴화의 느낌이다. 이렇게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이름으로 생산되는데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지향점과 철학의 차이야말로 우리술의 다양성을 좀 더 풍성하게 해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명인안동소주의 35도는 깔끔하고 명쾌하다. 얼음장같은 투명함 위에 알싸하고 풍성한 멥쌀의 향, 그리고 과하지 않은 조청의 맛과 적절한 쓴맛이 차례로 스쳐간다. 이 전반적인 과정이 경쾌하게 진행되는 것도 매력이다. 지름이 좀 넉넉하고 배가 볼록한 잔을 사용하는 것을 추천할 정도로, 향은 모자람이 없다. 필터링의 방점이 향 전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잡향을 걸러내는 것에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안동소주 대란' 때의 35도 제품 가격이 4천원대였고, 많이 올랐다고 오른 게 6천원대임을 감안하면 만드신 분들을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가성비다. 플래그십 제품이라 할 수 있는 45도는 35도와 결이 많이 다르다. 연이어 비교시음해 보면 같은 술에 물을 타는 것만으로 농도조절을 한 제품이 아니라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증류 중 끓어 나오는 용액은 크게 나누어 셋으로 구분한다. 제일 처음 나오는 '초류', 그 다음의 '본류', 마지막에 나오는 '후류'(말류)다. 성분상 버려야 하는 초류와 후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구간이라면 술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적당한 양을 본류와 혼합해 쓰기도 한다. 초류가 앞다리살, 후류가 우둔살이라면 본류는 등심이자 안심이자 갈빗살이다. 그만큼 맛과 향이 풍부한 구간이라는 얘기다. 명인안동소주 45도는 이 본류의 향을 최대한 살렸다. 그래서 향 자체는 35도보다 오히려 발랄한 감이 있다. 사탕수수와 잘 익은 감 같은 과실향의 이중주가 느껴진다. 입 안에서도 고도주 특유의 작열감은 분명히 있지만, 뒷부분에 달콤한 기운이 좀 더 오래 지속되는 느낌이어서 무겁지 않다. 세심한 필터링은 45도에서도 분명한 강점을 드러낸다. 세련된 대중성. 어쩌면 21세기의 우리술에 꼭 필요한 덕목을 명인안동소주 한 모금에서 발견한다.

 

 

 

 

 

 

 

"제가 생각하는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참신한 창조를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가정집 중에 3대째 된장을 안 빚어온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도 상품화가 되고 생명력이 유지되는 것은 그저 만들던 대로 만든 것이 아니고,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게 재창조된 것들이거든요.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뼈대는 고치지 않더라도 젊은 세대가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합니다. 맛의 변화, 품질의 변화로 개선을 해나가야지, 명인의 술이라고 해서 답습만 해서는 전통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듬직하게 서 있는, 키큰 나무를 보게 되면 그것이 태고적부터 그 모습 그대로였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곤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랬을 리는 없다. 그 나무 또한 묘목 시절에 다른 나무의 그늘에서 빛을 제대로 쏘이지 못하고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이겨냈고, 뿌리가 채 영글기 전에 찾아왔던 태풍을 견뎌냈기에 지금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눈물겨운 이야기를 알고 마시는 한 잔은, 그래서 더 찬란하면서도 긴 여운을 남겼다.

천천히 잔을 돌리자 잔 벽을 따라 소주의 알코올이 땀처럼, 혹은 눈물처럼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글 : 탁재형 PD

탁재형 PD는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15년간 50개국을 취재하며, 세상의 넓음과 사람살이의 다양함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2002년 ‘KBS 월드넷’을 시작으로 ‘도전! 지구탐험대’, ‘세계테마기행’, ‘EBS 다큐 프라임-안데스’ 등 해외 관련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했으며 2013년부터 여행 부문 팟캐스트 부동의 1위인 ‘탁PD의 여행수다’를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여행 산문집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김영사(2016), 세계 음주 기행기 『일은 핑계고 술 마시러 왔는데요?』시공사(2020)등이 있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손상이나 치매를 유발합니다. 임신 중 음주는 기형아 출생 위험을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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