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 칼럼

전통주칼럼:: 술꾼들은 왜 술 많이 마신 걸 자랑할까? I 편성준 작가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21-08-20
  • 조회수 868

 

 

 

 

 

20대 후반에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로 취직을 해서 선배들에게 가장 자주 들은 얘기는 일을 열심히 하자거나 뛰어난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오는가? 같은 건설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그들은 출근해서 나와 눈만 마주치면 어젯밤에 술을 얼마나 마셨나를 보고하느라 바빴다. “아,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김 과장하고 새벽 세 시까지 마셨다니까.” “난 밤새 마시다가 술집에서 곧장 회사로 출근했거든?”같은 고백들은 일견 한탄의 형식을 띄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은근한 자랑이 섞여 있었다. 지금은 직장에서 회식 문화가 거의 다 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퇴근 후 술 한 잔은 직장인들의 필수 코스였고 그러다 보니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무리 중에서 약간의 존경(?)을 받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처음엔 멋모르고 선배들 술자리를 따라다니던 나도 어느 순간 벌게진 얼굴로 술 냄새를 풀풀 충기며 출근해서는 "아, 죽겠어요. 어제 새벽 두 시까지 마셨잖아."라고 중얼거리면 동료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나의 향상된 음주력에 약간의 경의를 표하며 비로소 팀의 막내를 아군으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인스타그램 @samyangchoon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술꾼들은 왜 전날 술 마신 얘기 하는 걸 좋아하는 걸까. 나는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이 재밌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순진한 생각에 ‘음주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직장 동료나 가까운 친구들과 술 마시며 있었던 사소한 수다나 에피소드를 기록하는 일종의 음주 일지였는데 의외로 인기가 좋아서 50회 넘도록 연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생활 침해’를 주장하는 몇몇 등장인물의 지속적 항의로 인해 연재를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의 음주일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술 마신 걸 아내에게 들켰다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나는 가명을 써서라도 계속 연재를 해볼까 했으나 실명이 아닌 인물들로는 캐릭터가 살지 않아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어떤 심리학자가 쓴 글을 읽었는데 인간에게는 ‘속죄 본능’이라는 게 있어서 몸에 나쁜 줄 알면서도 술과 담배를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즉, 술 마신 얘기를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이는 이유는 ‘내가 어젯밤에 스스로를 이토록 괴롭히며 반성을 했으니 그걸 좀 알아 달라’는 무의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무알콜 음료나 니코틴 없는 담배가 소비자들에게 외면받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쉽게 수긍이 가는 분석이었다. 만약 마실수록 몸이 좋아지는 술이나 담배가 나왔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사람들은 숨어서 술을 마실 것이고 어른들은 술 마시는 젊은이들을 보면 이런 식으로 욕을 할 것이다. “저것들은 나이도 젊은 게 몸 챙기느라 아주 술고래에 골초야!”

 

 

 

 

(좌) 인스타그램 @oraaai_0902, (우) 인스타그램 @suldog_ac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넷플릭스로 <심야식당 2>와 <선술집 바가지> 등을 보다가 “일본 드라마 못 쓰겠네.”라고 중얼거리던 아내가 돌연 주방으로 가서 오이김치와 삼양춘 약주를 들고 왔다. 인천의 소규모 지역 특산주 양조장인 송도향이 빚은 이 술은 더술닷컴에서 전통주 칼럼 쓰라고 내게 보내준 약주인데 ‘2018 대한민국 주류대상'의 우리술 약주 부문에서 ‘베스트 오브 2018’을 수상했다고 한다. 소도향의 강학모 대표는 20여 년간 몸담았던 금융 공기업을 돌연 사직하고 술 빚기 인생을 시작했다. 삼양주는 조선시대 한양, 경기, 인천지역에서 사대부들이 즐기던 술이라는데 ‘세 번 빚는다'는 의미의 ‘삼양’과 ‘술은 겨울에 빚고 봄에 마셔야 맛있다'는 의미의 ‘춘’ 자를 조합해 송 대표가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나는 이 술을 보자마자 엉뚱하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을 떠올렸다. 아들이 태어나길 바라며 문밖에서 “낳았느냐?”라고 묻던 아버지가 세 번 만에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지은 이름이라는데 술을 세 번이나 빚는 술도가 사람들의 마음도 성삼문 아버지의 간절했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해서였다.

이 약주는 세 번을 빚고 70~100일 동안 숙성을 거친 발효주이기 때문인지 일반 곡주와 달리 뒷맛이 깨끗한 편이다. 풍부한 과일향을 중심으로 희미한 단맛과 산미도 느껴진다. 15도나 되니 많이 마시면 숙취가 있겠구나 생각했으나 내가 받은 건 한 병뿐이라 숙취 경험은 요원한 일이었다. 아내와 삼양주 약주를 나눠 마시던 나는 ‘술을 더 보내 달라고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영국의 성직자이자 작가인 토머스 풀러는 바다에 빠져 죽는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는 사람이 더 많다고 했다던데 더 이상 술 욕심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늘은 아쉽지만 한 병 약주에 만족하며 김영승 시인의 ‘반성 16’이라는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칼럼을 마칠까 한다. 시의 내용은 쉬우면서도 공감이 가는데 아마 술꾼들이라면 공감대가 두 배 이상으로 커질 것이다.

 

 

 

반성 16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김영승, 반성, 민음사, 1987.

 

 

 

 

 

삼양춘 약주

주종: 약주

양조장: 송도향전통주조

알콜도수: 15%

용량: 500ml

원재료 : 강화섬쌀, 전통누룩, 정제수

 

 

 

 


 

 

 

글 : 편성준 작가

MBC애드컴, TBWA/Korea 등의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서든리', '2월31일' 등의 프로덕션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했습니다. 2020년에 '좀 바보 같이 살아도 큰일 안 난다' '미루지 말고 지금 놀자'라는 이야기를 담은 첫 에세이집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현재 글쓰기에 대한 책 집필과 글쓰기·책쓰기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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