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술 칼럼

전통주 칼럼::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두 번 떨어진 사연 I 편성준 작가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2021-11-04
  • 조회수 793

 

 

 

 

 

술은 어떤 주종을 마시느냐보다 언제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단지 맛을 즐기거나 흥을 돋우기 위해서만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역사와 문화를 살펴봐도 바로 증명이 된다. 우리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나 혼인을 할 때는 반드시 술을 준비했으며 전쟁이 끝나거나 축제를 즐길 때도 어김없이 술과 함께 했다.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은 그날의 기쁨이나 시름을 함께 나눌 자격을 인정받는 셈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술잔을 나누었다. 대학 일 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2학년을 넘어서니 소위 '결정적인 술자리'라는 게 가끔 생겨났다. 어떤 사건이나 인간관계의 시발점 또는 변곡점이 되는 술자리를 말하는데 이십대에는 당연히 남녀관계가 주를 이루었다. 술은 인간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분위기를 돋우므로 ‘연애 비즈니스’에는 술자리가 필수인 것이다. 가끔 술을 전혀 안 마시고 맨 정신으로 데이트하는 남녀를 직접 목격하거나 그들에 대한 첩보를 듣기도 하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맹숭맹숭한 상태로 어떻게 그 은근하고 알싸한 마음을 전하고 나아가 사랑을 고백하며 스킨십을 시도한단 말인가.

 

 

물론 연애가 아니더라도 결정적인 술자리는 늘 있었다. 그 술자리가 아니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고 우연한 술자리에서 들은 충고나 조언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술 때문에 잊히지 않는 추억이 생기기도 한다. 꼭 술 때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술 마신 다음날 일난 일이니 여기에 적어볼 생각이다. 운전면허 시험이 관한 에피소드다. 나는 군대 가기 전 휴학 기간에 운전면허학원에 등록을 했으나 게으름을 피우느라 자주 결석을 하는 바람에 결국 학원 과정을 수료하지도 못한 채 입대를 하고 말았다. 학원비를 대준 어머니로서는 어이가 없었겠지만 당장 불안한 눈빛을 한 채 논산훈련소로 향하는 막내아들에게 차마 운전학원 얘기를 꺼낼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뒤 다시 운전면허학원에 등록을 하고 2종 보통면허 취득에 도전했다. 운전학원 과정을 모두 끝내기 전에 필기시험을 먼저 치는 게 좋다고들 해서 시험 신청도 먼저 했다. 의외로 문제가 어렵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그래도 최소한 중고등학교 6년 내내 기술과 공업 과목을 이수한 사람 아닌가, 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므로 시험 전날 하루 정도만 벼락 치기를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필기시험 전날 결정적인 술자리가 있었다. 어떤 여자애가 술을 사 달라고 하는데 운전면허 필기시험공부 때문에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즐겁게 술을 마셨고 그날 밤엔 아무 일도 없이 헤어졌다.

 

 

 

 

 

 

 

 

 

다음날 아침 나는 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못한 상태로 학창 시절 내내 배웠던 기술과 공업 교과서의 표지를 떠올리며 운전면허시험장으로 들어갔는데 아뿔싸, 소문은 사실이었다. 시험문제는 생각보다 어려웠고 시험을 치자마자 발표되는 점수에 의하면 나는 62점으로 불합격이었다. 하늘이 노랬다. 70점이 합격점인데 명색이 대학생씩이나 되어가지고 운전면허 실기도 아닌 필기시험에서 떨어지다니. 나는 풀이 죽은 불합격자들 사이에 서서 수입인지를 새로 사서 붙이고 재시험 신청을 해야 했다. 그리고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다가 몇 달 후 다시 시험날을 맞았다. 이번에도 바로 전날 결정적인 술자리가 잡혔다. 이번엔 내가 약간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자 선배와 술을 마실 일이 생겼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겨 술이나 한잔하자는데 매정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선배는 의외로 술이 셌고 우리는 대취했으나, 역시 아무 일 없이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또 시험공부를 하지 못한 상태로 시험장에 가서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68점, 불합격이었다. 한 문제만 더 맞았어도 합격할 수 있었는데. 정말 아까운 점수였다. 당장 지난번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황당하던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아, 말도 안 돼. 이번엔 그냥 합격했다고 말해야지.

 

 

가족들은 아직도 내가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한 번만 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아마 이 사건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세 번째 시험 전날 술 약속이 잡히지 않아 무사히 합격을 했고 그 이후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술을 삼간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면 좋겠으나 이상하게 중요한 일을 앞두고 갑자기 생기는 술자리의 전통은 여전히,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 불합격 에피소드 말고도 내게 또 어떤 '결정적인 술자리'가 있었나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마침 더술닷컴에서 술을 보내왔다. 이번엔 탁주가 아니라 '도원결의'라는 증류주였다. 막걸리·약주·증류주를 모두 생산하는 영덕주조에서 만든 이 제품은 5년 연속 경북지역의 명품주로 선정될 정도로 품질이 좋다고 한다. 15도짜리 술이라 은은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운 것은 당연했지만 유난히 깨끗한 맛이 돋보였다. 아내가 무슨 술이냐고 묻길래 도원결의라고 했더니 "삼국지야?"라고 되물었다. 네이밍을 접하고 삼국지의 주인공들이 처음 만나 의형제를 맺는 장면이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나는 이들이 복숭아나무 아래서 뜻을 모았다고 해서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유비 관우 장비가 활동하던 당시 그 지역에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그런 사자성어가 생긴 거라고 괜히 아는 척을 했다. 그래도 복숭아 향이 나는 술이니 도원결의는 잘 지은 이름임에 틀림없다. 나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전날 마신 술이 소주가 아니라 이런 고급 증류주였으면 혹시 70점을 넘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조선 전기 시인 이승소(李承召)의 시를 인터넷에서 찾아냈다. 친구 집에 술이 익으면 가서 함께 비파 소리를 듣고, 자기 집에 꽃이 피면 친구를 불러들여 노래를 감상하자고 하면서 세월이 빠르게 흐르니 시간을 아껴 술을 마시라 권하는 유머러스한 한시인데, 한자 실력이 형편없는 관계로 한글 해설을 먼저 읽고 한자를 짜 맞추어 읽어야 했다.

 

 

 

 

 

너의 집에 술이 익으면 비파 소리를 들으러 가고

우리 집에 꽃이 피면 고운 노래를 감상하러 온다.

오가며 서로 즐기고 마시는 것을 저어하지 말자.

해와 달은 던져진 듯 세월을 채근하고 있으니.

君家酒熟聽琵琶 我屋花開賞艶歌

莫厭往來相樂飮 曦娥如擲促年華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술자리는 어디였을까?'라는 주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생각을 굴려 보았으나 공자(孔子)님도 말씀하시기를 "술 마시고 취하지 않았을 때와 같이 행동하기 어렵다." 하였으니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일이 있을 때만큼은 술을 되도록 자제해야 한다는 평범하고도 싱거운 결론으로 이 칼럼을 끝내게 되었다. 쑥스럽다.

 

 

 

 

 

도원결의

주종: 증류주

양조장: 농업회사법인 (주)영덕주조

도수: 15%, 25%, 40%

용량: 360ml

원재료: 정제수, 쌀, 복숭아, 효모, 젖산

 

 

 

 

 


 

 

 

 

 

글 : 편성준 작가

MBC애드컴, TBWA/Korea 등의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서든리', '2월31일' 등의 프로덕션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했습니다. 2020년에 '좀 바보 같이 살아도 큰일 안 난다' '미루지 말고 지금 놀자'라는 이야기를 담은 첫 에세이집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현재 글쓰기에 대한 책 집필과 글쓰기·책쓰기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뇌졸중, 기억력 손상이나 치매를 유발합니다. 임신 중 음주는 기형아 출생 위험을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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